문헌록 전자족보(대동보) > 문헌록
           
1. 문헌 목록 〉17. 17世 〉15. <부정공>처사휘성하묘지명(處士諱成夏墓誌銘)
1. 문헌 목록 〉17. 17世 〉17. <부정공>쇄연당처사공휘기하묘갈명(灑然堂處士公諱器夏墓碣銘)
1. 문헌 목록 > 17. 17世 >  
16.<부정공>쇄연당처사공휘기하가장(灑然堂處士公諱器夏家狀)
灑然堂處士公諱器夏家狀 公諱器夏字大仲號灑然堂初諱峻夏我趙氏高麗侍中諱璋爲鼻祖三傳至諱元吉與圃牧陶冶幷稱五隱封玉川府院君生諱瑜虔谷以麗朝副正不受我 朝徵命幷旌忠孝再傳諱智崙昆季四人築相好亭友愛尤篤有江淮之風三傳諱大春號三灘與 金河西白玉峰兩先生友善寔七世以上也曾祖諱維綱祖諱之珣考諱重望妣長澤高氏參奉傅礪女所生考諱泰望號詠歸堂以孝 命旌妣文化柳氏景昌女府君以肅宗辛巳六月二十日生氣宇峻爽性度寬仁事兩庭志體兼養居外內憂易戚備至與兄生員公友篤食則共卓學則連案臨歿作割臂願而述懷事載江南樂府早從尹屛溪金渼湖兩先生得聞爲學之方以眞知實踐爲主亟被獎詡爲士類推重筆法精妙弟兄受授文字皆書筆執二字可信無疑而志氣豪健家畜善馬每出入僕夫跟蹌隨之恨不能及云人到于今稱之又切於慕賢重修先世相好亭一新舊制嘗受玉川書院寒暄堂金宏弼廟庭碑文於金渼湖門不幸捐舘於京師其歸葬也渼翁尤加嗟悼而京鄕士友執誄致奠無慮三百篇會葬者三百餘人時己卯五月二十二日也享年五十九葬于順天大龜村前峴亥坐原配陽川許氏綊女文敬公珙后戊寅生莊肅閑雅甚有婦德癸巳十一月二十一日卒壽七十六墓祔左育二女而無嗣以兄生員公崇夏子聖淳爲子二壻金圭大薛弘迪也孫載根澤根邦根出后外孫金邦鑑金有鑑薛泰本也曾玄多不盡錄噫大抵狀也者狀其行也觀其當日言論動止風儀氣像然後可以形容其彷髴而况才質庸陋見識譾劣且生於二百餘年之後何敢泚筆於吾七世祖考狀德之文也哉此亦不思之甚也雖然見其處於家庭則生養兩庭無間言割半之痛出於至誠稱美樂府孝友家風於此振矣師友則不遠千里從事依歸竟至大故學問淵源於此正矣爲先則殫誠於重修貽厥孫模追遠報本之心於此歸厚矣此皆載於本院廟庭碑文及生員公與府君書嗚呼府君當日嘉言懿行非後孫之所可窺測而內則有是父有是子外則有是師有是友矣門戶則依然肅然乎謝陶之風矣田野則廣矣大矣乎大門之坪矣金谷之松楸欝欝靑蒼麻胡之江水滾滾不盡幸路指點而停驂賓客此肩而滿座吾家中興之美見稱於南州者實此時也不肖登玉川院奉審以退讀其碑文府君諱啣歷歷班班不忍輒退彷徨周匝自然興感述懷一篇以寓專親親之慕而己餘何可論後之覽者叅之以族大夫石汀翁所撰碣銘焉則始知斯言之不誣矣故謹取始終如右以竢君子裁擇焉 七世孫 東勳 謹撰 쇄연당처사공휘기하가장(灑然堂處士公諱器夏家狀) 공의 휘는 기하(器夏)요, 자는 대중(大仲)이며 호는 쇄연당(灑然堂)이고 초휘는 준하(峻夏)인데 우리 조씨는 고려 시중 휘 장(璋)을 시조로 三전하여 휘 원걸(元吉)은 포은 목은 도은 야은과 함께 五은이라 칭하고 옥천부원군을 봉하였으며 생휘(生諱) 유(瑜) 호 건곡(虔谷)은 고려 부정(副正)으로 아조의 소명을 받지 않았으므로 충효로 정표하였고, 재전(再傳)하여 휘 지륜(智崙)은 형제 四인이 상호정(相好亭)을 짓고 우애 독실하여 강회대금(江淮大衾)의 풍운이 있으며 三전하여 휘 대춘(大春), 호 삼탄(三灘)은 김하서(金河西), 백옥봉(白玉峰) 두 선생과 더불어 착한 벗이었으니 곧 七세이상이었다. 증조의 휘는 유강(維綱)이요, 조의 휘는 지순(之珣)이며, 고의 휘는 중망(重望)이고 비는 장택고씨 참봉 부여(傅礪)의 딸이다. 소생 고의 휘는 태망(泰望)이고 호는 영귀당(詠歸堂)인데 효행으로 정표하였고 비는 문화유씨 경창(景昌)의 딸이었다. 부군은 숙종(肅宗) 신사(一七○一)년 六월 二十일에 태어났는데 기질과 기량이 높고 밝으며 성정과 도량이 너그럽고 어질어 생양(生養) 양정을 섬기며 뜻과 몸을 함께 기르고 외내(外内)의 상사(喪事)를 당하여 치상 애통이 갖추어 지극하며 형 생원공과는 우애가 두터워 먹을 때는 상을 같이하고 배울 때는 책상을 나란히 하다가 죽었으므로 다시 회생한다면 팔뚝을 자른다는 글을 지어 슬픔 심사를 기술하여 일이 강남악부(江南樂府)에 실렸다. 일찌기 윤병계, 김미호 두 선생을 쫓아 학문하는 방법을 듣고 진리를 알아 실천할 것을 주장하여 자주 큰 칭상을 입어 사림의 추중한 바 되고 필법(筆法)이 정묘하여 아우와 형의 주고받은 문자를 썼으며 지기(志氣)가 웅호(雄豪)하여 집안에 좋은 말을 길러 매양 출입할 때마다 마부(馬夫)가 비틀거리며 따라와도 미치지 못함을 한탄하였다. 사람들이 지금까지 칭도하고 선현을 간절히 추모하여 선대의 상호정(相好亭)을 중수하여 옛 제도를 일신하였으며 일찌기 옥천서원(玉川書院) 묘정비문(廟庭碑文)을 김미호에게 받아가지고 불행히 경사(京師)에서 별세하시니 미호가 더욱 슬퍼하고 경향사우(京鄕士友)가 제문을 지어 전을 올린것이 무려 三백편이요, 장예에 모든 조객이 三백여인이었다. 때는 기묘년 五월 二十二일이요, 향년 五十九세인데 순천 대구 마을 앞 고개 해좌원에 안장하였고 배는 양천 허씨 협(綊)의 딸이요, 문경공(文敬公) 공(珙)의 후손인데 무인년생으로 씩씩하고 엄숙하며 단아하여 부덕이 있고 계사년 十一월 二十一일에 수 七十六세로 별세하였으며 묘소는 공의 묘 좌측에 부장하였다. 후사가 없어 형의 아들 성순(聖淳)을 양자로 삼았으며, 여는 김규대, 설홍적의 처요, 손자는 재근, 택근, 방근인데 방근은 출후하였고 외손은 김방감(金邦鑑), 김유감(金有鑑), 설태본(薛泰本)이며 증현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아! 장문은 그 행실을 쓴 것이라 그 당시의 언론, 동정, 풍채, 기상을 본 연후에 가히 방불하게 그려낼 수 있는 법인데 하물며 재질이 용렬하고 견식이 천단한 사람이 또 그 백여년 뒤에 출생하여 어찌 감히 우리 七세 조고 장덕의 글을 제대로 쓴다고 하겠는가. 이 또한 심히 생각하지 못한 일이나 비록 가정에 거하여서는 생양 양정에 사잇말이 없고 반신(半身)을 자른다는 슬픔이 지성에서 일어나 강남악부(江南樂府)에 아름다운 일이라고 칭송하였으나 효도하고 우애한 가풍이 진작(振作)하였고 사우(帥友)에는 천리를 멀다하지 않고 의지하며 종사하다가 마침내 그곳에서 별세하시었으니 그 학문의 연원이 이에 정대하며 위선(爲先)은 중수에 정성을 다하고 손모(孫謨)를 끼쳤으니 추원 보본한 마음이 중후하여 이것이 다 옥천서원의 묘정비문 및 생원공과 부군의 글에 실렸다. 아! 부군의 당일 아름다운 말과 착한 행실은 후손이 미루어 헤아릴 바 아니나 안에는 아버지에 아들이 있고 밖에는 스승과 벗이 있어 사안도잠(謝安陶潜)의 풍의가 있으며 전야는 커서 대문의 안뜰이 넓고 금곡(金谷)의 송추는 울울창창하며 마호(麻湖)의 강수는 꿈틀거리고 흘러 다하지 않고 길가는 사람은 손가락으로 가르치며 말을 먹이며 손님은 어깨를 겨누어 자리에 가득하니 우리집 중흥의 미덕이 남주(南州)에 자자한 것이 실로 이때였다. 불초가 옥천원에 올라 봉심(奉審)하고 물러나와 비문에 부군의 휘함이 역력히 새겨져있는 것을 읽고 차마 곧 물러나지 못하고 방황하며 자연히 감상을 일으켜 한 편을 술회하여 존존친친(尊尊親親)의 영모를 이루었을뿐 그 나머지를 어찌 의논한단 말인가. 후인이 볼 때에 족대부 석정옹(石汀翁)이 찬술한 갈명을 참고하면 이 말이 허식이 아님을 알 것이므로 삼가 시종을 이상과 같이 취하여 군자의 재택을 기다린다. 七세손(世孫) 동훈(東勳) 삼가 지음
 
1. 문헌 목록 〉17. 17世 〉15. <부정공>처사휘성하묘지명(處士諱成夏墓誌銘)
1. 문헌 목록 〉17. 17世 〉17. <부정공>쇄연당처사공휘기하묘갈명(灑然堂處士公諱器夏墓碣銘)